쪽의 오룡천(五龍川)·아오지천(阿吾地川) 등의 지류를 합한 뒤, 수량과 하폭을 증대하면서 하구 부근의 호소지대(湖沼地帶)를 거쳐 서수라(西水羅) 부근에서 동해로 들어간다. 두만강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한청문감 漢淸文鑑》 만주지명고(滿洲地名考)에서 언급하고는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두만강은 또, 고려강...
빛돌의 하루(2024-07-15 22:37:00)
알 수 없다. 다만 1732년에 간행한 이재(李栽, 1657~1730)의 밀암집 「창옥연명」41에 ‘수주(愁州, 종성)’의 주계(朱桂)가 오석벼루를 만든 기록으로 보아 조선 후기 17세기부터 연석산지로 알려진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성해응의 연경재전집, 「연보」에 “종성의 아란석이 오룡천에서 나오는데 우리나라 벼루의 으뜸...
donga3388님의블로그(2024-11-09 00:00:00)
기시천과 오룡천이 함류하는 그 자리에 끝을 맺는 산줄기에 자리하고 있다. 양전리 자연마을을 나누는 지맥은 도곡 뒷산에서 뒷골을 경계로 하여 도곡리와 경계를 이루며 음지밭달이 자리하고 도곡 뒷산에서 쇠죽고개와 채봉산을 겅계로 자리하고 있다. - 장대봉 양전1리 뒷산으로 산록에 고경명선생비가 있다. * 물줄기...
금산이 아름답다.(2020-06-02 11:42:00)
동쪽의 오룡천, 도치천, 외남천 등은 주암호로 흘러들어 보성강~섬진강 물길따라 광양만으로 흘러든다. 남면의 오룡천계곡 가는길: 15번&22번국도주유소에서 영동고개 오름길은 의외로 잘 나 있지만 통행인이 드물어 수풀이 웃자랐다. 숲속을 빠져 나오면 통신탑이 차지한 능선 날등길은 개간이 되서 조망이 시원하고...
풍경속으로(2016-03-16 08:41:00)
환경은 풍수지리와 관련이 깊다. 평탄면과 오룡천을 자라형국으로 해석해 오산이라 하였던 점이 이를 웅변해 준다. 오산리에는 오래된 초등학교, 마스토미가...하고 혹자는 광복 직후에 옮겨졌다고도 한다. 석팁은 그 양식이 통일신라의 석탑에 비해 정교하지 못한 까닭에 고려 후기나 조선 전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宅田書窓(2023-01-22 23:04:00)
조선후기 실학자 중 신경준은 우리의 북방영토를 고구려 발해의 고토라고 하였다. 효종은 심양에 억류 중에 받았던 수모와 학대에 대한 복수심으로 인해 불벌을 계획하였다. 송시열, 송길준등의 불벌지지를 힘을 얻었으나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효종의 웅지는 수포로 돌아가고. 효종이 심혈을 기울인...
N o b l e L o g 노 블 로 그 N o b l e L o g(2005-02-06 07:35:00)
은 오룡천에서 나는데 우리 동쪽 벼루에서 가장이다 갑산과 무산석 또한 좋다 청나라 사람이 벼루 재료를 논할 때 혼동강의 송화석이 심히 가품이라 일컫는데 혼동강은 장백산에서 출원하여 일명 송아리강이라 하니 송아리라는 것은 한어로 은하수다 강가의 지석산에서 녹색돌을 많이 내는데 옥같이 맑고 밝게 윤나며...
블로그 훈민관(訓民館)(2008-03-04 08:43:00)
조선후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문신 정3품으로 되어 있다. 임기는 30개월이었다. 종5품 판관이 있었지만 『속대전(續大典)』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회령(會寧)의 예에 따라 1659년(효종 10)에 없앤 것으로 보인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부사에 직속된 이속(吏屬)으로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후무사(7월 자두) 과수원(2016-03-26 11: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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